1차 (96) 썸네일형 리스트형 방과후 마수제거마법부 «손바닥 위» 밴드부 합숙 소식을 들은 엄마는 영 탐탁찮은 눈치였다. “꼭 가야되겠니?” “음…,” 상선은 죄책감을 덜어보려고 시선을 피했다. “엉….” “공부는 하고 있지?” “당연하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상선도 자신의 미래가 걱정되었다. 어쨌든 인서울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고 있을 때가 아닌데? ‘얼른 연습 끝내고 조금이라도 공부해야지…!’ 그런 연유로, 민박집으로 향하는 상선의 베이스 케이스에는 단어장과 오답노트가 들어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미약한 죄책감을 덜어줄 임시방편에 불과했고, 막상 숙소에 도착하면 공책은커녕 단어장조차 펼쳐보지도 않을 것임을 상선은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악보를 들여다보면서 를 치고 있었더니 종이만 봐도 신물이 올라왔던 것.. 방과후 마수제거마법부 «공평한 거리» P가 박상선을 처음 본 건 2018년 컵스카우트 하계 캠프에서였다. 상선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캠핑도구를 꺼내고 있었다. 당시 박상선은 어정쩡한 길이의 중단발이었고 앞머리가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혼자 잔디밭에 앉아 느긋하게 코펠을 꺼내고 뚜껑을 닦는 박상선은 또래아이들에 비해 답답하고 일머리가 없어보였다. ‘쟨 다른 애들이 조 짤 때 안 데려가려고 하겠다.’ P가 텐트 지지대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을 무렵, 박상선은 코펠을 전부 닦아서 한 데 쌓아놓곤 설렁설렁 다른 곳으로 이동했고, 몇 분 뒤엔 다른 아이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해먹을 묶고 있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무리가 만들어졌다. 얼마 뒤 상선은 아이들과 함께 돌아오더니 아직까지 텐트 설치에 매달려 있는 P를 .. 로스탄 아래 «죽는 것은» 지지는 단상으로 올라가 힘차게 숨을 들이마셨다. 초속 100km의 속도로 피치파 마을을 아우르는 쾌청한 공기와 온갖 냄새가 지지의 콧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지의 뱃속에는 때마침 형광색 버섯과 곰팡이와 이끼가 자라고 천장에선 잿빛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이 어마무시한 콧바람이 들이닥치면서 그녀의 뱃속에서 벌어지던 사랑스러운 난장판은 흔적도 없이 쓸려나가고 말았다. 마침내 속이 텅 빈 느낌을 받은 지지는 뱃가죽을 문지르며 여러분을 향해 빙그레 웃었고, 리스피어 교수가 화답해주자 그녀의 뱃속에선 침착함과 용기라는 싹이 하나씩 솟구쳐 올랐다. “지지 ‘융’ 헌팅턴입니다! 오늘 저는 그동안 작성해온 논문의 중간 단계를 발표하려고 합니다.” 그녀 곁을 빙글빙글 돌던 소환수가 차례로 등 뒤에 붙더니 곧 여.. 로스탄 아래 «지지의 나무» 지지가 그 나무를 키우기 시작한 건 2학년 때다. 집에서 가지고 온 작은 묘목이었다. 지지의 오빠가 시험 삼아 만들어낸 새 품종이었는데 제대로 자라지 못해서 세 그루 째 말라죽게 되자 이걸 개량할 순 없다고 판단하고 남은 마지막 한 그루였다. 지지는 오빠에게 이 나무를 달라고 했다. 지지의 오빠는 흔쾌히 그 빼빼마른 나무를 건네주었지만, 사과나무라는 건 구색일 뿐 정작 무슨 색깔의 열매가 열릴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괜찮아. 팔 만한 게 열리진 않을지 몰라도 어쨌든 키우면 뿌듯해질 것 같아!” 과수원 집안의 딸자식으로서 어깨 너머 배워온 여러 가지 지식은 분명 유용하게 쓰였다. 한동안 지지는 이 작다란 나무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에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가지를 치고, 비료를 푸고, 영양제를 넣고.. 로스탄 아래 «풍선» 지지는 아름다운 풍선을 만들고 있었다. 열여덟 살 때다. 날씨가 좋았다. 피치파 마을의 바람은 후덥지근한 법이 없고 서늘하고 건조해서 언제나 창문을 열어놓을 수 있었다. 창가에 기대어 황금빛 액체를 머그컵에 넣고 흔들고 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듣고 있던 건 무슨 과목이었지? 가물가물하다. 어쨌든 약초학 강의는 아니었다. 졸고 있지 않았으니까. 한창 수업 중인 강의실 문을 두들긴 것은 당시 지지를 담당하던 해던 교수였다. 그가 지지를 찾았다. 그는 그때 지지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호명했는데(“지지 헌팅턴 학생을 불러주세요”), 지지는 아직도 해던 교수가 사용하던 어투에 담긴 무게, 그 무게로 감지할 수 있는 비일상의 전조를 잊지 못한다. 계단식 강의실을 천천히 내려와 교단을 지나치는 동안 지지는 등이 차갑.. 황금의 물결 «당신의 공방» 칼베가에 도착하자마자 위에나는 복잡한 도시 생활이 그리워졌다. 슈텐에는 어디를 가도 최소 2층짜리 건물이 세워져있었고 길도 편리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칼베가에도 포장된 도로가 있기는 했지만 가장자리 군데군데가 깨져있어 마차가 활발히 지나다니기 힘들고 도시 자체가 구식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위에나는 도시 입구까지 도보로 30여분 정도 걸어온 상태였는데, 마차사고가 있어 그녀를 태운 마차가 진입할 길목이 완전히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나는 너무 피곤한 상태로 이곳에 도착한 나머지 모든 게 나빠 보이기만 했다. 아무리 애써도 이 도시를 도무지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무의식이 어떻게든 트집을 잡기 위해 도시의 풍경을 둘러보는 동안 주변은 점차 어두워지고 위협적으로 변했다.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자.. 황금의 물결 «황금벌판» 어느 화창한 9월의 오후, 겐나디는 내가 일하는 공방으로 뛰쳐들어왔다. 나는 키 낮은 책상에 허리를 굽히고 앉아 도면을 그리고 있었다. 작년부터 일하기 시작한 조수 갈리나는 재료에 사포질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큰 소리에 놀라 동시에 현관을 쳐다보았다. 덜컹거리는 마차, 새의 지저귐, 바람의 결을 따라 흔들리는 나뭇잎사귀 소리가 벌컥 열린 문과 함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고 만 것 같았다. 겐나니는 늑대에 쫓기다 헛간으로 몸을 던진 새끼 사슴처럼 잔뜩 경직된 허벅지와 번쩍이는 시선을 갖고 있었다. 그 애는 잠시간 안절부절 못하더니 내가 웅크리고 있는 책상까지 두리번거리며 걸어왔다. 그러더니 나가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지금 당장 그래야 한다고 했다. 그 애가 거칠게 나를 끌고 나가는 동안 갈리나는 어쩔 줄.. 모래에 선 뼈 «이다이라 관계로그» 사르다르, 들었어? 푸른 매의 히라이드가 아드리나를 좋아한대. 벌써 우리 중 절반은 알고 있을 걸. 사르다르는 잠자코 듣다가 되물었다. 어느 아드리나? 바람거미의 아드리나. 사르다르의 시큰둥한 반응이 비난처럼 느껴졌던 건지 도도나는 변명처럼 덧붙였다. 놀리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어. 그냥, 언젠가 걔네 둘이 결혼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 기분이 뭔지 궁금했거든. 사르다르는 수평선을 응시했다. 뭐, 둘만 좋다면 결혼하는 거지. 그는 바람거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우리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청혼을 하게 되려나.” “글쎄, 모르지.” 사르다르가 꿩을 세며 대답했다. “우리 중 하나를 좋아하게 된다니, 상상이 잘 안가.” “음, 그것도 모르는 일이지.” 도도나는 벌렁 모래 위에 드러누웠다. “.. 모래에 선 뼈 «아그네이 관계로그» 노래하는 모닥불의 나나루는 아그네이의 이모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한 사실 중 하나는, 철을 녹여 샴쉬르를 만드는 데에는 불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닥불 일가와 샴쉬르의 집이 마주보고 있다는 것이다. 사르다르의 어머니, 샴쉬르 두 자루의 자드나는 말했다. “나나루는 나름대로 생각이 많은 사람이지. 불을 알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하는 법이란다. 생각 없이 쓸 수는 없는 거지.” 그렇다면 샴쉬르는 불을 통한 발상의 결과물인가? 흥미로운 것은 모닥불 앞에서 직관적으로 샴쉬르를 떠올릴 수는 없으며, 샴쉬르를 사용할 때에도 불이 필수적으로 필요치는 않다는 것이다. 이때 둘 사이의 연결고리는 소실된 것처럼 보인다. 사르다르는 아그네이와 오래 알아왔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모래에 선 뼈 «르샤흐 리퀘스트» 사르다르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이렇게 시작한다. 영리하구나. 그런 뒤에는 그의 머리를 차례로 쓰다듬는 손이 있다. 키가 장대만한 어른들의 얼굴은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로 칭찬을 받고 있었는지도 희미해져, 지금은 단지 그 순간의 의문만이 남아있다. 영리하다니. 무엇에 대한?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페네쿠스의 할라는 아이들을 잘 돌보고, 잿빛 실타래의 라이한은 누구나 만족시킬 맛좋은 요리를 한다. 곧은 물병자리의 타드나는 놀라운 솜씨로 장신구를 엮고, 바람거미의 테르마는 아름다운 바구니를 만들 수 있다. 사르다르가 생각하고 판단하기로 마을에는 영리한 아이들이 많다. 그는 자신이 영리한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르다르는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그는 방의 모서리에 서있었고, 그 때문에.. 이전 1 2 3 4 ··· 10 다음